가족 중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 남은 가족들은 가해자 측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배상금은 상속분에 따라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나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만약 유족 중 한 사람만 국가나 공단으로부터 매달 연금을 받고 있다면 어떨까요? 그 연금이 나머지 가족들의 몫까지 갉아먹어, 정작 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자녀들은 손해배상금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2024년 11월, 대법원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1992년부터 30여 년간 유지돼 온 계산 방식, 즉 “손해배상금 전체에서 유족연금을 먼저 뺀 뒤 나머지를 나눠 갖는다”는 방식을 “먼저 나눠 갖고, 유족연금은 그 연금을 받는 사람의 몫에서만 뺀다”는 방식으로 정반대로 뒤집은 판결입니다. 공무원·교직원·군인 등 공적연금에 가입된 가족을 둔 사람이라면, 혹은 그런 사건을 다루는 실무자라면 반드시 알아둬야 할 내용입니다.
사건 개요 — 대학교수가 오토바이를 타다 택시에 치여 숨진 사고
원고들의 가족인 소외 2는 사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2016년 오토바이를 운전해 1차로를 따라가다 급하게 유턴을 시도한 택시에 부딪혀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사고 택시는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의 공제계약이 적용되는 차량이었습니다.
소외 2가 정년까지 근무했다면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퇴직연금일시금은 약 3억 5,800만 원이었고, 이를 사망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9,150만 원이었습니다. 이 금액이 바로 ‘일실 퇴직연금 상당의 손해배상채권’입니다. 소외 2의 배우자와 자녀 두 명이 이 채권을 상속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학연금공단은 배우자에게만 ‘직무상유족연금’을 지급했습니다. 이미 지급된 금액과 소외 2의 기대여명이 끝나는 2050년까지 지급될 예정 금액을 모두 사망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약 9억 7,265만 원에 달했습니다. 일실 퇴직연금 손해배상채권(약 1억 9,150만 원)보다 훨씬 큰 금액입니다.
원심(2심)은 이 사건에서 오랫동안 유지돼 온 계산 방식, 이른바 ‘공제 후 상속’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일실 퇴직연금 손해배상채권 전체(약 1억 9,150만 원)에서 유족연금(약 9억 7,265만 원)을 먼저 공제하면 남는 금액이 없다고 보아, 자녀들의 청구를 전부 기각했습니다. 유족연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자녀들이 오히려 배우자가 받는 연금 때문에 손해배상금을 아예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30년 가까이 유지된 ‘공제 후 상속’ 방식과 그 문제점
원심이 따른 계산 방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법원은 1992년 판결(92다7269)을 시작으로 1994년, 2000년(두 차례), 2007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일관되게 ‘공제 후 상속’ 방식, 즉 일실 퇴직연금 손해배상채권 전체에서 유족연금 등을 먼저 공제한 뒤 그 나머지만 상속인들이 나눠 갖는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 방식의 논리는 “같은 성격의 급부를 이중으로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를 손해배상채권 전체에 적용하면, 이번 사건처럼 유족연금을 받지 않는 상속인까지 그 여파를 고스란히 떠안는 결과가 생깁니다. 유족연금은 어디까지나 그 연금의 수급권자(이 사건에서는 배우자)에게만 귀속되는 고유한 권리인데, 정작 연금과 무관한 자녀들의 상속분까지 함께 줄어드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의 판단 — “상속 후 공제”로 30년 만의 판례 변경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사건에서 종전 다섯 개 판결의 입장을 모두 변경했습니다. 새로운 계산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실 퇴직연금 상당의 손해배상채권은 먼저 상속인들에게 각자의 상속분 비율대로 공동상속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속인들 중 유족연금 수급권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상속받은 몫’에서만 유족연금을 공제합니다. 손해배상채권 전체에서 먼저 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으로 나뉜 이후 수급권자 개인의 몫 안에서만 공제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의 실제 숫자로 과거 방식과 현재 방식을 대비해보면 그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과거] 공제 후 상속: 일실 퇴직연금 손해배상채권 총액(1억 9,150만 원)에서 유족연금 총액(9억 7,265만 원)을 먼저 공제합니다. 유족연금이 손해배상채권보다 훨씬 크므로 남는 금액은 0원이고, 이 0원을 상속인들이 상속분대로 나눠 가지므로 배우자든 자녀든 결국 아무도 받지 못합니다. 실제로 원심은 이 방식으로 계산해 자녀들의 청구를 전부 기각했습니다. [현재] 상속 후 공제: 손해배상채권 총액(1억 9,150만 원)을 먼저 상속분 비율대로 나눕니다. 배우자와 자녀 두 명이 상속인이므로 각자의 몫이 정해지고, 그런 다음 유족연금 수급권자인 배우자의 몫에서만 유족연금을 공제합니다(배우자 몫을 넘는 유족연금은 더 이상 공제하지 않습니다). 유족연금과 무관한 자녀들의 몫은 애초에 공제 대상이 아니므로 그대로 손해배상금으로 인정됩니다. 같은 사건, 같은 숫자를 놓고도 계산 순서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자녀들이 받는 배상금은 ‘0원’에서 ‘온전한 자기 상속분’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대법원이 이런 결론을 내린 근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형평의 이념입니다. 유족연금 수급권자가 일실 퇴직연금 손해배상채권까지 상속받는다면 같은 목적의 급부를 이중으로 받는 셈이니 그 사람의 몫에서 공제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수급권자가 아닌 상속인은 애초에 유족연금을 받지 않으므로, 그 사람이 받은 손해배상금은 이중 지급이 아닙니다. 이중 지급이 아닌 부분까지 공제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유족연금 수급권의 법적 성질입니다. 유족연금은 상속인이라서 받는 것이 아니라, 유족이 법률에 따라 직접 취득하는 고유한 권리입니다. 그래서 이 권리는 애초에 사망한 사람의 상속재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귀속되는 주체 자체가 다른 두 개의 권리(손해배상채권과 유족연금 수급권)를 서로 상쇄시킬 근거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셋째, 사회보장법률의 목적입니다. 유족연금 액수가 손해배상채권보다 커서 실질적으로 일부 중첩되는 결과가 생기더라도, 그 중첩분은 유족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급부일 뿐입니다. 이를 근거로 손해배상채권 전체를 공제해 버리면, 결국 사회보장 재원으로 가해자의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셈이 되어 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이 급여의 종류·사유·금액에 관한 사항을 공무원연금법과 공무원 재해보상법 규정을 그대로 준용하는 구조라는 점도 짚었습니다. 즉 이번 판결이 실질적으로 판단한 내용은 공무원연금법 조항의 해석 그 자체이므로, 공무원이 재해로 사망한 사건에도 같은 법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결국 원심판결 중 자녀들의 청구 부분은 파기되어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환송됐고, 배우자의 상고와 자녀들의 나머지 상고는 기각됐습니다(과실비율을 20%로 본 원심 판단도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실무자의 시각에서 — 어디까지 적용되는 판결인가
실무적으로 보면, 이 판결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사망한 가족이 어떤 공적연금에 가입돼 있었는지, 그리고 유족연금(또는 유족급여) 수급권자가 상속인 중 누구인지입니다. 배우자만 수급권자이고 자녀는 수급권자가 아닌 경우가 실무에서 가장 흔한데, 바로 이런 구조에서 이번 판결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납니다.
이 판결이 사학연금법 사건에서 나왔지만,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실제로 해석한 대상은 공무원연금법 조항 자체입니다. 따라서 공무원이 직무상 재해나 교통사고 등 타인의 불법행위로 사망한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봐야 합니다. 이미 200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2008다13104)가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유족급여에 대해 같은 취지의 ‘상속 후 공제’ 법리를 확립해 둔 상태였는데, 이번 판결로 공적연금 영역까지 같은 원칙이 정리된 셈입니다. 서로 다른 사회보장 제도라도 ‘수급권자 고유의 권리인지, 상속재산에 포함되는지’라는 동일한 기준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일관성 있는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보험이나 공제조합을 상대로 한 사망사고 손해배상 소송·합의 실무에도 영향이 있습니다. 가해자 측(보험사·공제조합)이 배상액을 산정할 때 유족연금 전체를 손해배상채권 총액에서 먼저 공제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면, 이제는 상속인별로 몫을 먼저 나눈 뒤 실제 수급권자의 몫에서만 공제하는 방식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유족연금을 받지 않는 상속인의 배상금이 종전보다 두터워지는 방향으로 실무가 바뀌는 셈입니다. 다만 이 판결의 법리가 국민연금이나 개인 사보험의 사망보험금처럼 성격이 다른 급부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지는 이번 판결만으로 단정할 수 없고, 개별 사건마다 해당 급부의 법적 성질을 따로 살펴봐야 합니다.
확인/체크리스트
- 사망한 가족이 공무원·사립학교 교직원 등 공적연금 가입자였다면, 유족연금(유족급여) 수급권자가 상속인 중 누구인지부터 확인합니다.
- 손해배상 협상이나 소송에서 상대방(보험사·공제조합)이 제시한 배상액 계산 방식이 ‘상속 후 공제’인지, 여전히 과거의 ‘공제 후 상속’ 방식인지 확인합니다.
- 유족연금을 받지 않는 상속인(흔히 자녀)이라도 일실 퇴직연금 상당의 손해배상채권에 대한 자신의 상속분은 별도로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둡니다.
- 국민연금·사보험금 등 이 판결이 다룬 공적연금과 성격이 다른 급부가 얽혀 있다면, 이 판결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사안인지 전문가와 함께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글은 유족연금공제 · 과실비율 · 교통사고 태그와 이어집니다. 관련 실제 사례와 칼럼은 콘텐츠가 쌓이는 대로 함께 연결해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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