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나 산업재해로 다쳐 국민연금 장애연금을 받고 있다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국민연금공단이 지급한 연금은 당연히 전액 손해배상금에서 빠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단이 이미 그만큼 돈을 냈으니, 나중에 가해자로부터 그 돈을 그대로 되찾아가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24년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당연해 보이는 계산법을 정면으로 손봤습니다. 국민연금공단이 가해자에게 되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대위 범위)을 ‘연금급여 전액’이 아니라 ‘그중 가해자 책임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제한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공단이 스스로 떠안아야 합니다. 국민연금 수급자가 교통사고 등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건이라면 꼭 알아둬야 할 판례입니다.
사건 개요 — 사지마비 장애를 입은 오토바이 운전자와 국민연금공단
원고는 2016년 사천시의 한 교차로를 직진하던 택시에 오토바이 앞바퀴 부분을 부딪혀 사지마비 등 중대한 장애를 입었습니다. 이 사고로 발생한 일실수입 손해는 약 2억 8,200만 원이었고, 택시를 운전한 사람의 책임비율은 60%로 확정됐습니다(원고 과실 40%). 택시는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의 공제계약이 적용되는 차량이었습니다.
원고는 국민연금 가입자로서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2016년 8월분부터 2021년 7월분까지 60개월간 장애연금 합계 2,653만 7,850원을 받았습니다. 공단은 국민연금법 제114조 제1항에 따라 원고에게 지급한 연금급여만큼 원고의 가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신 행사할 수 있는데(대위), 이 소송에서 국민연금공단이 원고를 승계해 직접 당사자로 참가했습니다.
쟁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원고의 과실이 섞인 손해배상액을 계산할 때 ‘과실상계를 먼저 하고 그 다음 연금급여를 공제’할 것인지, ‘연금급여를 먼저 공제하고 그 다음 과실상계’를 할 것인지. 둘째, 공단이 가해자에게 대신 청구할 수 있는 금액(대위 범위)이 ‘연금급여 전액’인지 ‘그중 가해자 책임비율에 해당하는 금액’만인지입니다.
이 사건에서 원심(서울중앙지법)은 이미 공단의 대위 범위를 ‘연금급여×가해자 책임비율’로 제한해 계산했습니다. 이 계산 결과에 불복해 상고한 쪽은 오히려 국민연금공단이었습니다. 공단은 자신이 지급한 연금급여 전액을 가해자로부터 되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며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법원은 이 문제를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정반대 입장이었던 종전 판례(2007년, 2011년 판결)를 명시적으로 변경했습니다.
대법원의 판단 — “공제 후 과실상계”로 대위 범위를 제한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공제 후 과실상계’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피해자의 손해액에서 먼저 연금급여 전액을 공제한 다음, 그 나머지 금액에 과실상계를 적용해 가해자가 배상할 금액을 정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공단이 가해자에게 대위할 수 있는 범위는 연금급여 전액이 아니라, ‘연금급여액 중 가해자의 책임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제한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면, 공단이 대위할 수 있는 금액은 장애연금 2,653만 7,850원 중 가해자 책임비율 60%에 해당하는 1,592만 2,710원으로 제한되고, 나머지 1,061만 5,140원(연금급여 중 원고의 과실비율 40%에 해당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원고를 대위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연금급여를 지급한 이후에도 여전히 손해를 전부 전보받지 못한 원고를 위해, 공단이 최종적으로 떠안아야 합니다.
대법원이 이런 결론을 내린 근거는 여러 갈래입니다.
첫째, 조문 자체의 한계입니다. 국민연금법 제114조 제1항은 ‘그 급여액의 범위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한다고만 정하고 있을 뿐, 과실상계로 손해배상청구권이 줄어든 경우 공단이 연금급여 전액을 대위할 수 있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조문만으로 ‘전액 대위’가 당연히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국민연금 제도의 목적입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령·장애·사망에 대비해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을 도모하는 사회보장 제도입니다. 국민연금법은 가입자 본인의 고의로 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도 연금 지급 여부를 공단의 재량에 맡기고 있는데, 이는 사고에 가입자의 책임이 있더라도 사회보험의 보호에서 함부로 배제하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이런 목적은 대위 범위를 판단할 때도 고려돼야 합니다.
셋째, 손해배상청구권과 연금 수급권의 성격 차이입니다. 손해배상청구권은 과실책임주의에 따른 권리이고, 연금 수급권은 사회보장적 성격의 권리입니다. 국민연금법 제114조 제1항은 피해자가 이중으로 이익을 얻거나 가해자가 책임을 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정 규정일 뿐, 피해자에게 가장 불리한 해석(전액 대위)을 강제하는 규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단이 대위할 수 있는 범위를 가장 유리하게 해석하더라도, 피해자는 연금급여를 받은 후 남은 손해의 범위에서만 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므로 이중 이익의 문제는 애초에 생기지 않습니다.
넷째, 수급권자와 공단 사이의 형평입니다. 사고가 순전히 피해자 본인의 과실로 일어난 경우라도 공단은 재량으로 연금을 지급할 수 있고, 그 경우 피해자는 연금급여만큼은 손해를 전보받는 이익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가해자의 불법행위와 피해자의 과실이 함께 손해를 일으킨 경우에도, 적어도 ‘연금급여 중 피해자 과실비율에 해당하는 금액’만큼은 공단이 부담해야 할 몫이자 피해자가 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를 넘어 공단이 전액을 대위한다면, 실질적으로 공단이 부담해야 할 부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결과가 됩니다.
다섯째, 연금 수급권의 재산권적 성격입니다. 국민연금 재정의 대부분은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로 형성되므로, 연금 수급권은 보험료에 대한 반대급부이자 재산권의 성격을 가집니다. 공단의 대위 범위를 피해자에게 가장 불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이런 재산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이미 확립된 판례와의 통일입니다. 대법원은 2021년 국민건강보험(2018다287935), 2022년 산업재해보상보험(2021다241618)에서 이미 같은 취지로 ‘공제 후 과실상계’ + ‘대위범위 가해자 책임비율 한정’ 법리를 확립해 두었습니다. 국민건강보험·산재보험·국민연금은 모두 사회보장적 성격을 지닌 사회보험 제도이므로, 법질서 안에서 통일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설명입니다.
실무자의 시각에서 — 공단의 재정 이익보다 개별 피해자를 우선한 판결
이 판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새 법리에 반발해 상고한 당사자가 다름 아닌 국민연금공단 자신이었다는 점입니다. 공단은 연금재정을 확보하려는 유인이 있으니 대위 범위를 최대한 넓게 해석받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연금재정 확보가 수급권자인 피해자의 이익보다 반드시 우선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사회보험 제도를 운영하는 기관의 재정적 이해관계와 개별 가입자·피해자의 이익이 충돌할 때, 법원이 후자를 우선한 사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판결은 국민건강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 판결에 이어 세 번째로 나온 같은 취지의 전원합의체 판결입니다. 세 판결을 관통하는 원칙은 하나입니다. 사회보험급여 중 피해자 본인 과실비율에 해당하는 부분은 보험자(공단)가 최종적으로 부담하고, 가해자는 자신의 책임비율 범위 안에서만 구상당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다룬 사학연금 판례는 사망사고에서 상속인들 사이의 배분 순서를 다룬 것이었고, 이번 판결은 부상·사망 사고에서 과실상계와의 계산 순서 및 공단의 대위 범위를 다뤘다는 점에서 쟁점은 다르지만, 두 판결 모두 “사회보험 급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손해배상에서 불리해져서는 안 된다”는 같은 방향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실무적으로 보면, 국민연금 가입자가 제3자의 불법행위로 장애·사망에 이르러 장애연금·유족연금을 받는 사건에서는, 국민연금공단의 구상금(대위) 청구액이 연금급여 전액이 아니라 사고 당시 확정된 가해자 책임비율만큼으로 제한됐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자동차보험·공제조합 손해사정 실무에서도 공단의 구상 청구를 받았을 때 이 판례를 기준으로 청구 범위가 적정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재보험금과 근로자재해보험(근재보험)의 관계처럼, 하나의 사고에 여러 사회보험·공제 제도가 얽혀 있다면 각 제도별로 이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따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만 이 판결의 실제 금전적 효과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피해자에게 무조건 유리해진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계산 순서가 바뀌면서 가해자가 최종적으로 부담하는 손해배상액 자체도 함께 달라지기 때문에, 사고마다 과실비율 구조에 따라 실제 수령액에 미치는 영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판결의 핵심은 “피해자가 항상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공단이 자신이 최종적으로 부담해야 할 몫(연금급여 중 피해자 과실비율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운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확인/체크리스트
- 국민연금(장애연금·유족연금) 수급자가 제3자의 불법행위로 손해를 입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국민연금공단의 대위(구상) 청구액이 연금급여 전액인지 확인합니다.
- 그 청구액이 사고 당시 확정된 가해자 책임비율을 반영해 제한됐는지(연금급여×가해자 책임비율) 확인합니다.
- 손해배상액 계산이 ‘공제 후 과실상계’ 방식(손해액에서 연금급여를 먼저 공제한 뒤 과실상계)으로 이뤄졌는지 확인합니다.
- 이 판례는 국민연금뿐 아니라 국민건강보험·산업재해보상보험에서도 같은 원칙이 이미 확립돼 있으므로, 관련 사회보험급여가 얽힌 사건이라면 함께 검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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