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분쟁 사례입니다. 열한 살 아이가 공터 옆 가건물 앞에서 미리 준비해 간 일회용 라이터로 A4용지 스무 장에 불을 붙였습니다. 불은 가건물로 옮겨붙었고, 안에 있던 비품들이 타버렸습니다. 누가 봐도 우발이 아닌 고의, 방화입니다.
보험에서 고의 사고는 면책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습니다. 우연한 사고를 보장하는 보험의 본질상, 일부러 낸 사고까지 보상하면 보험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족이 가입해 둔 가족일상생활배상책임보험도 당연히 면책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안에서 보험금은 지급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가 이번 글의 주제입니다.
열한 살은 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
먼저 아이 본인의 책임부터 봅니다. 민법 제753조는 미성년자가 “행위의 책임을 변식할 지능”이 없는 때에는 배상책임이 없다고 정하고 있고, 법원은 대체로 만 12세 미만에 대해 이 책임변식능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열한 살인 이 아이는 법적으로 배상책임을 질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으로 다뤄지므로, 피해자에게 배상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럼 피해자는 누구에게도 배상받지 못할까요. 여기서 부모가 등장합니다. 책임능력 없는 미성년자를 감독할 법정 의무는 부모에게 있고(감독자책임), 그 감독을 소홀히 한 사이 아이가 사고를 냈다면 부모가 피해자에 대한 배상책임을 집니다. 즉 이 사건에서 법률상 배상책임의 주체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입니다.
“고의 면책”은 사람마다 따로 판단한다
이제 보험 이야기입니다. 가족일상생활배상책임 특약은 기명피보험자 본인만이 아니라 배우자, 생계를 같이하는 동거 친족 등 가족을 폭넓게 피보험자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피보험자 중 한 명(아이)이 고의로 사고를 냈을 때, 계약 전체가 면책될까요.
대법원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대법원 2012. 12. 13. 선고 2012다1177 판결). 배상책임의 성립 요건도, 고의 면책 조항의 적용 여부도 피보험자 각자를 기준으로 따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안에 대입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이를 기준으로 보면 고의 사고이므로 아이 몫의 보험금은 면책이 맞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기준으로 보면, 부모는 불을 지르려 한 것이 아니라 감독을 소홀히 한 과실이 있을 뿐입니다. 부모의 배상책임은 과실책임이고, 과실로 인한 배상책임은 일배책이 보상하는 전형적인 사고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서 자녀 기준으로는 지급 거절, 피보험자인 부모 기준으로는 지급 — 이 두 결론이 동시에 성립합니다.
실무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습니다. 보험사가 “자녀의 고의 사고라 면책”이라고만 안내하며 청구를 종결하려 한다면, 부모의 감독자책임을 근거로 부모를 피보험자로 하는 청구가 별도로 성립하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 —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고
이 구조를 뒤집어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중학생 아이가 학교 운동장 축구 경기에서 수비를 하다가 상대 공격수와 무릎이 부딪혔고, 상대 학생이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시리즈 앞 편에서 다뤘듯, 축구처럼 신체접촉이 내재된 경기에서 정상적인 플레이 중 발생한 사고는 “사회적 상당성”의 범위 안에 있어 불법행위책임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행위가 불법행위가 아니라면, 부모의 감독의무 소홀을 논할 전제 자체가 사라집니다. 감독자책임은 아이의 가해행위를 전제로 하는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아이도, 부모도 법률상 배상책임이 없고, 가족 중 누구를 기준으로 봐도 보험금 지급 사유가 없습니다.
방화 사례와 축구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자녀의 고의 사고는 오히려 부모 쪽에서 보상 통로가 열리고, 자녀의 정상적인 경기 중 사고는 어느 쪽으로도 통로가 없습니다. 직관과 반대로 움직이는 셈입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에도 부모가 다친 학생 쪽에 치료비 명목의 위로금을 건네는 일이 많은데, 법률상 책임 없이 지급한 위로금을 보험으로 회수할 수 없다는 원칙은 여기서도 같습니다.
실무자의 눈으로
실무에서 자녀 사고 건을 검토할 때 제가 확인하는 순서는 정해져 있습니다. 첫째, 아이의 나이와 책임능력. 둘째, 아이의 행위가 불법행위로 평가되는지. 셋째, 그렇다면 청구의 축을 아이로 세울지 부모로 세울지. 같은 사건이라도 누구의 책임으로 구성해서 청구하느냐에 따라 면책과 부책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가족형 배상책임보험은 피보험자가 여러 명인 보험이고, 그만큼 청구의 경로도 여러 갈래라는 사실이 자주 잊힙니다. “고의라서 안 됩니다”라는 한 줄 안내가 그 여러 갈래를 모두 닫아버리는 것은 아닌지, 소비자도 알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를 둔 보험 소비자라면 — 확인할 것들
- 내 계약의 피보험자 범위부터 확인하세요. 기명피보험자 1인만 보장하는 계약인지, 배우자·동거 친족까지 포함하는 가족형인지에 따라 이 글의 논의가 적용되는 범위가 달라집니다.
- 자녀의 고의 사고라도 청구를 포기하지 마세요. 자녀 기준으로 면책이어도, 부모의 감독자책임을 근거로 한 보상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대법원 2012다1177). 거절 안내를 받았다면 “피보험자별 판단”이 이뤄졌는지 확인하세요.
- 자녀 나이가 중요합니다. 만 12세 미만이면 통상 책임능력이 부정되어 부모의 감독자책임이 전면에 나옵니다. 책임능력이 인정되는 연령대(중고생)라면 판단 구조가 달라질 수 있어 개별 검토가 필요합니다.
- 학교·운동 중 사고는 책임 성립 여부부터 따지세요. 정상적인 경기 중 사고라면 배상책임도, 보험금도 없는 “불운한 사고”일 수 있습니다. 이때 다친 아이 쪽은 본인의 실손·상해보험으로 치료비를 해결하는 것이 맞는 경로입니다.
- 위로금은 배상금이 아닙니다. 책임이 확인되기 전에 지급한 돈은 보험으로 돌려받기 어렵습니다. 지급 전에 책임 구조를 먼저 확인하고, 판단이 어려우면 함께 검토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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