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진단서에 협심증이라고 적어줬다면, 보험금은 당연히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정식 자격을 갖춘 의사가 여러 검사를 거쳐 내린 판단이니까요. 그런데 이 통념이 대법원에서 뒤집힌 사건이 있습니다. 심지어 1심과 2심 모두 환자 승소로 끝난 사건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사건 개요 — 관상동맥 협착 20%, “상세불명의 협심증” 진단
피보험자는 허혈성심질환 진단비 특약이 포함된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이 특약은 협심증, 급성심근경색증 등으로 분류되는 허혈성심질환으로 “진단 확정”된 경우에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정하면서, 그 진단은 병력과 함께 심전도, 심장초음파, 관상동맥촬영술, 혈액 중 심장효소 검사 등을 기초로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피보험자는 약 5일간 심해진 흉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해 심전도, 흉부 X선 촬영, 심장초음파, 심근효소 검사, 관상동맥조영술을 모두 받았습니다. 심전도와 흉부 X선, 심장초음파, 심근효소 검사에서는 특이한 소견이 나오지 않았지만, 관상동맥조영술에서는 세 개 혈관에 각각 20% 정도의 협착이 확인됐습니다. 담당 의사는 이를 근거로 “상세불명의 협심증”으로 진단하면서도, 협착이 경미해 스텐트 삽입술까지는 시행하지 않고 약물치료와 경과 관찰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함께 남겼습니다.
피보험자가 이 진단서로 보험금을 청구하자, 보험사는 두 개 대학병원에 의료자문을 의뢰했습니다. 한 자문의는 협심증을 의미 있는 병변으로 진단하려면 관상동맥조영술에서 50% 이상의 협착이 있어야 하는데 이 환자는 뚜렷한 이상 소견이 없어 협심증으로 확진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자문의도 20% 정도의 협착은 정상인에게서도 흔히 나타나는 수준이며, 상세불명 협심증을 진단하려면 최소 50~70% 이상의 협착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보험사는 이 자문 결과들을 근거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습니다.
원심의 판단 — “이미 받은 진단은 뒤집을 수 없다”
피보험자는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 모두 승소했습니다. 원심(2심)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담당 의사가 약관이 요구하는 검사를 모두 거쳐 진단을 내렸고, 특약에는 “진단 확정”의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후에 다른 의사의 판단으로 이미 받은 진단을 번복하거나 부인할 수 있다는 규정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보험사 측 자문의들은 피보험자를 직접 진찰한 것이 아니라 진료기록만 보고 사후적으로 의견을 낸 것이므로, 이를 근거로 담당 의사의 진단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원심은 만약 이미 받은 확정 진단을 보험사가 부인할 수 있게 하면, 피보험자는 소송을 제기하고 그 절차에서 다시 신체감정을 받는 등의 절차를 강요받게 되는데, 이는 명확하지 않은 약관으로 인한 불이익을 피보험자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봤습니다.
대법원의 판단 — 진단서 한 장으로 보험사고를 단정할 수 없다
대법원 2014. 6. 12. 선고 2013다208678 판결은 이 원심 판단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먼저 보험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책임은 보험금을 청구하는 피보험자 측에 있다는 원칙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허혈성심질환 진단비 특약에 따라 보험금을 받으려면, 국내외 의사 자격을 갖춘 사람이 병력과 함께 심전도, 심장초음파, 관상동맥촬영술, 심장효소 검사 같은 객관적인 검사 결과를 근거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의료기준에 맞춰 진단을 확정한 경우여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의사가 이런 검사를 거쳐 상세불명의 협심증으로 진단했다면 그 진단은 보험사고의 근거자료가 될 수 있지만, 그 진단의 바탕이 된 검사 결과가 충분하지 않거나 일반적인 의료기준에 미흡하다고 볼 만한 사정이 있다면, 진단 사실 하나만으로 보험사고가 발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대법원은 원심이 “이미 받은 확정 진단은 사후적인 다른 진단으로 번복하거나 부인할 수 없다”고 본 부분 자체가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진단에 필요한 충분한 검사가 이뤄졌는지, 의사의 진단이 충분한 근거를 갖췄는지는 신체감정이나 재진단 같은 절차를 통해 사후에 검증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런 사후적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불합리하다고 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 이 법리를 적용하면서 대법원은, 관상동맥조영술에서 뚜렷한 협착 소견이 나타나지 않았고, 소송 과정에서 이뤄진 진료기록감정에서도 협심증을 확정하려면 운동부하 검사, 심장관류 스캔, 변이형 협심증 유발 검사 같은 추가 검사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으며, 보험사 측 자문의들의 판단도 같은 방향이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이런 사정들을 종합하면 관상동맥조영술 등의 검사를 거쳤다는 사실만으로 이 진단이 객관적인 검사 자료에 근거했다고 볼 수 없고, 상세불명의 협심증으로 진단한 것이 일반적인 의료기준에 부합하는지도 문제 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므로 원심으로서는 진단 이후의 병력과 치료 경과를 살펴보거나 신체감정, 재진단 등을 통해 진단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인했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결론이었습니다.
실무자의 시각에서 — 이 판례가 소비자에게 의미하는 것
이 판례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진단서에 병명이 적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험금 지급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협착 수치처럼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검사 결과가 있는 질환이라면, 그 수치가 임상적으로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지가 진단의 타당성을 가르는 핵심 기준이 됩니다.
실무적으로 보면, 협심증·심근경색 같은 허혈성심질환 진단비 분쟁을 검토할 때는 진단명 자체보다 그 진단의 근거가 된 검사 수치부터 확인합니다. 관상동맥조영술 결과가 애매한 수준(대략 20~40%대)이라면 십중팔구 다투게 될 사안이라고 보고, 운동부하 검사나 심장관류 스캔 같은 보완 검사가 있었는지부터 살핍니다.
다만 이 원칙을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지점도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흉통으로 입원한 며칠 사이에, 환자가 스스로 어떤 정밀검사를 더 받아야 하는지 판단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담당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검사를 다 받고 정식 진단서까지 발급받았는데도, 훗날 소송에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환자에게 준비할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습니다. 결국 이 판례가 실제로 의미 있으려면, 진단 초기 단계부터 검사 수치와 진단 근거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는 습관이 함께 필요합니다.
확인/체크리스트 (실용적 행동 지침)
- 협심증·심근경색 등 허혈성심질환으로 진단받았다면, 그 진단의 바탕이 된 검사 수치(관상동맥조영술 협착 %, 심전도 소견 등)를 진단서나 소견서에서 직접 확인합니다.
- 협착 수치가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수준(통상 50% 이상)에 못 미친다면, 운동부하 검사·심장관류 스캔·변이형 협심증 유발 검사 등 추가 정밀검사를 받을 수 있는지 담당 의사와 상의합니다.
- 보험사로부터 지급거절 통보를 받았다면, 자문의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의료자문 결과지를 요청해 확인합니다.
- “이미 진단서를 받았으니 뒤집히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말고, 소송이나 분쟁조정 절차에서 신체감정·재진단으로 다시 검증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대응을 준비합니다.
- 진단 초기 단계의 검사 기록과 소견서를 최대한 상세히 확보해 두는 것이, 훗날 분쟁이 생겼을 때 가장 확실한 방어 자료가 됩니다.
이 글은 협심증 · 허혈성심질환 · 진단확정 태그와 이어집니다. 관련 실제 사례와 칼럼은 콘텐츠가 쌓이는 대로 함께 연결해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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