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를 당하고 보험사와 합의서에 도장을 찍거나, 소송 중 법원의 화해권고결정을 받아들이고 사건을 마무리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몸 상태가 합의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빠졌다면 어떨까요. 이미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문구에 서명했으니 이제 와서 손 쓸 방법이 없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합의의 효력은 합의 당시 예상할 수 있었던 손해까지만 미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습니다. 다만 이 원칙이 실제로 어떤 조건에서 인정되고, 어디까지 청구할 수 있는지는 판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합의서에 서명했는데도 추가로 청구할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다만 무조건은 아닙니다. 대법원은 “그 손해가 합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예상이 불가능한 것으로서, 당사자가 이를 예상하였더라면 그 합의금액으로는 화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당할 만큼 중대한 것일 때”에는, 그 손해에 대해서까지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해 왔습니다(대법원 1997. 8. 29. 선고 96다46903 판결, 대법원 1999. 6. 22. 선고 99다7046 판결, 대법원 2000. 3. 23. 선고 99다63176 판결, 대법원 2001. 9. 14. 선고 99다42797 판결 등).
실무적으로 보면, 이 문제를 검토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 손해가 합의 당시에 정말로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인가. 둘째, 합의가 사고 직후 손해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성급하게 이루어진 것인가. 이 두 조건이 함께 인정되어야 “합의의 효력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96다46903 판결은 교통사고 후 치료 도중, 사고 발생 겨우 10일 만에 이루어진 합의였습니다. 그 후 피해자가 수술 도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는데, 법원은 사망이라는 결과는 합의 당시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므로 합의의 효력이 사망에 대한 손해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합의서에 “일체의 권리 포기”라고 써 있어도 상관없나요?
상관없습니다. 대법원이 반복해서 확인한 부분입니다. 합의서의 문구가 아무리 포괄적이어도, 법원은 그 문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당사자가 실제로 무엇을 포기하려는 의사였는가”를 따집니다. 당시 예상하지 못했던 중대한 손해까지 포기했다고 보는 것은 당사자의 진의에 반한다는 것이 판례의 일관된 시각입니다.
법원이 재판 중에 내린 화해권고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법원 2021. 7. 29. 선고 2016다11257 판결은, 교통사고 피해자가 사지마비 상태에서 여명이 4.982년으로 추정된다는 감정 결과를 근거로 화해권고결정을 통해 배상금을 지급받고 “나머지 청구를 포기”했던 사안에서, 피해자가 예측된 여명기간을 훨씬 넘겨 생존하자 추가 손해에 대한 배상청구를 인정했습니다. 사인 간 합의뿐 아니라, 법원이 개입한 화해권고결정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손해까지 확정적으로 막아버리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추가로 청구할 수 있나요? (소멸시효)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민법 제766조 제1항에 따라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완성됩니다. 그런데 후발손해의 경우 이 “안 날”이 언제인지가 핵심 쟁점입니다.
대법원은 “후유증 등으로 인하여 불법행위 당시에는 전혀 예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손해가 발생하였다거나 예상외로 손해가 확대된 경우”에는, 사고 당시가 아니라 “그러한 사유가 판명된 때”부터 새로 3년의 소멸시효가 진행한다고 봅니다(99다42797 판결). 2016다11257 판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명 예측을 기초로 배상이 확정된 사건에서 피해자가 예측 여명기간을 넘겨 생존한 경우 “늦어도 종전에 예측된 여명기간이 지난 때”부터는 소멸시효가 진행한다고 명확히 했습니다. 즉 증상이 서서히 좋아지는 과정에서 정확히 어느 날 “판명”되었는지 다투기보다, 적어도 예측 여명기간이 지난 시점을 기준선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무적으로 이 부분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례를 자주 봅니다. “추가로 청구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흘려보내고, 정작 확인해보려 나섰을 때는 이미 소멸시효 기산점을 훌쩍 넘겨버린 경우입니다. 소멸시효는 손해가 판명된 때부터 다시 진행하지만, 그 시점 자체를 넘겨버리면 아무리 사안이 억울해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겪고 계신 상황이 이 글에서 다룬 사례들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면, 혼자 판단하며 시간을 보내기보다 이른 시일 안에 전문가와 함께 사안을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추가로 인정되는 배상금은 얼마나 되나요?
여기서 흔히 오해가 생깁니다. 후발손해가 인정된다고 해서 처음부터 다시 전체 손해액을 계산해 합의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통째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법원은 “현재 나타난 최종적 내지 고정적 후유증상 등을 기초로 산정한 전체 손해 중에서, 합의 당시 인식하고 있었거나 예견할 수 있었던 손해 부분을 그 성질에 따라 해당 손해항목별로 공제하는 방식”으로 정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99다7046 판결).
풀어서 말하면, 지급받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합의 당시 예상하지 못했던 증가분”이지, 전체 손해액에서 이미 받은 합의금을 단순히 빼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계산은 감정 등 전문적인 증거 방법을 통해 항목별로 다시 확정해야 하는 영역이라, 실제 소송에서도 다툼이 잦은 부분입니다.
부모님이나 가족도 별도로 청구할 수 있나요?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99다7046 판결은 교통사고 피해자 본인과는 별도로 부모도 자신이 입은 정신적 손해에 대해 고유의 위자료청구권을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피해자 본인이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나머지 청구를 포기”했더라도, 그 효력은 원칙적으로 합의 당사자인 본인에게만 미칠 뿐, 부모가 별도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뜻을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따로 나타내지 않은 이상 부모의 위자료청구권까지 당연히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합의서에 함께 서명·날인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 원칙이 배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위 판결에서도 부(父)가 합의서에 나란히 서명했지만 “합의의 직접 당사자”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부모의 고유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봤습니다. 서명 여부보다 합의 당사자로 명시되었는지, 포기 의사가 실제로 있었는지를 따진다는 뜻입니다.
합의했다고 무조건 추가 청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예상 못한 손해면 다 청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무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99다63176 판결은 이 원칙이 실제로는 꽤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는 대퇴골 경부골절 수술 후 고관절 운동제한이라는 후유장해를 근거로 합의했는데, 이후 다른 병원에서 우측 다리가 단축되는 후유장해를 추가로 진단받자 별도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하급심은 이를 후발손해로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파기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니 다리 단축이라는 장해 자체는 합의 이전, 처음 수술을 받았을 무렵에 이미 발생해 있었고, 피해자가 단지 그 사실을 나중에 병원에서 재진단받아 알게 된 것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나중에 판명되었다”는 것과 “손해가 나중에 새로 발생했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점을 이 판결이 정확히 짚어줍니다.
실무적으로 보면, 이 구분이 실제 사건에서 가장 자주 다투어지는 지점입니다. 증상이 나빠진 시점과, 그 원인이 된 장해가 실제로 발생한 시점은 종종 일치하지 않습니다. 진단서나 감정서가 있다면 “장해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와 “언제 그것이 확인되었는지”를 구분해서 봐야 하고, 이 구분에 따라 청구 가능 여부와 소멸시효 기산점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보험사가 “이미 합의서에 서명했으니 끝난 사안”이라고 하면 그대로 포기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판례상 합의의 효력은 합의 당시 예상 가능했던 손해에만 미치므로, 그 이후 나타난 손해가 진짜로 예상 불가능했던 것인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험사의 안내만으로 단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Q. 사고 후 이미 몇 년이 지났는데 지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나요?
소멸시효 기산점이 “손해 발생 시점”이 아니라 “새로운 손해가 판명된 시점”일 수 있으므로, 단순히 사고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지만으로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기산점을 언제로 볼 수 있는지는 사안마다 다르므로 구체적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Q. 화해권고결정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다는데, 그래도 추가 청구가 되나요?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2016다11257 판결처럼 여명 예측을 기초로 한 화해권고결정이라도, 예측이 크게 빗나가 그 기간을 넘겨 생존하는 등 사정변경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툴 여지가 있습니다.
Q. 합의금을 받은 걸 반환해야 추가 청구를 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이미 받은 합의금은 그대로 유지한 채, 그 합의금이 포함하지 못했던 예상 밖의 손해 부분만을 별도로 청구하는 구조입니다.
확인 체크리스트
- 합의(또는 화해권고결정) 당시 근거가 되었던 진단서·감정서에 지금 문제되는 증상이나 장해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확인합니다.
- 지금 나타난 증상이 합의 당시 이미 존재했던 것이 나중에 재진단된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 실제로 새로 발생하거나 확대된 것인지를 구분합니다.
- 여명 예측이나 노동능력상실률 등 구체적인 수치를 근거로 합의했다면, 그 수치가 실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기록해 둡니다.
- 증상이 고정되거나 뚜렷하게 악화된 시점, 혹은 애초 예측 기간을 넘긴 시점을 특정해 소멸시효 기산점을 가늠해 봅니다.
- 피해자 본인 외에 부모 등 가족이 별도의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지도 함께 검토합니다.
- 위 사항들이 애매하다면, 새로운 의학적 감정을 통해 손해의 실체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출발점이 됩니다.
이 글은 부제소합의 · 후발손해 · 소멸시효 태그와 이어집니다. 관련 실제 사례와 판례는 콘텐츠가 쌓이는 대로 함께 연결해드릴 예정입니다.
본 콘텐츠는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적 판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사안은 반드시 전문가 상담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상담이 필요하시면 상단 메뉴의 ‘상담하기’를 이용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