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가 나면 경찰이 출동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눠줍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경찰이 과실비율 90대 10, 이렇게 정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경찰이 사고 현장에서 하는 일과, 과실비율이 정해지는 절차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해 — 경찰이 과실비율까지 정해준다?
경찰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하는 일은 형사처벌과 행정처분을 위한 조사입니다. 신호위반이나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해 사건을 처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급되는 문서가 교통사고사실확인원입니다.
그런데 이 문서는 과실비율을 확정하는 서류가 아닙니다. 손해보험협회 산하 자동차사고 과실비율 분쟁심의위원회도 “경찰은 각 당사자의 확정적인 과실비율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사실확인원은 이후 과실비율을 다투는 과정에서 쓰이는 여러 증거자료 중 하나일 뿐, 그 자체로 몇 대 몇이라는 숫자를 정해주는 문서가 아닙니다.
그럼 실제로 과실비율은 누가 정하나
1차적으로 과실비율을 산정하는 주체는 보험사입니다. 가해차량·피해차량 양측 보험사의 보상 담당자가 손해보험협회가 만든 ‘과실비율 인정기준’(사고 유형별로 기본 과실비율을 정리한 참고표)에 사고 상황을 대입해 과실비율을 계산합니다.
다만 이 기준표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규정이 아니라 참고자료입니다. 민법과 민사소송법상 과실비율의 최종 판단과 결정 권한은 법원 판사에게 있습니다. 실무적으로는 대부분의 사건이 소송까지 가지 않고 보험사 간 합의나 기준표 적용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이 기준표가 사실상의 기준처럼 작동하는 것뿐입니다. 이미 관련된 법원 판결례가 있는 사고 유형이라면, 기준표보다 그 판결례가 우선 참고됩니다.
보험사 간 의견이 갈리면 — 분쟁심의위원회
가해차량 보험사와 피해차량 보험사가 과실비율에 대해 의견이 다르면, 손해보험협회 산하 자동차사고 과실비율 분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주 오해하는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위원회는 개인이 직접 신청할 수 없습니다. 신청 자격은 보험사와 공제사에만 있고, 개인(피보험자)은 가입한 보험사에 “심의를 요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심의는 사안의 난이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실무진 협의 단계에서 대부분 정리되지만, 합의가 안 되면 변호사가 참여하는 소위원회, 그래도 안 되면 더 많은 변호사가 참여하는 재심의 단계까지 올라갑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심의에 걸리는 시간도 길어집니다.
중요한 건 이 위원회의 결정이 갖는 효력입니다. 보험사들끼리는 이 결정에 따르기로 사전에 협정을 맺어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구속력이 있지만, 개인에게는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즉 위원회가 특정 비율로 결론을 내렸다고 해도, 그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별도로 소송을 통해 다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억울하다면 —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정리하면, 과실비율에 이견이 있는 개인이 실제로 밟을 수 있는 경로는 이렇습니다. 먼저 가입 보험사 담당자에게 적용된 기준표 번호와 근거를 명확히 물어봅니다. 그 다음 보험사에 분쟁심의위원회 회부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위원회 결정에도 승복할 수 없다면 최종적으로 소송으로 다툴 수 있습니다.
다만 소송을 직접 진행하려는 경우 놓치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보험금을 먼저 받아버리면 보험사가 대위권(보험금을 지급한 대신 그 권리를 넘겨받는 권리)을 행사하게 되어, 이후 개인이 직접 소송을 이어가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직접 다퉈볼 생각이라면 보험금을 수령하기 전에 이 부분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실무자의 시각에서
실무적으로 보면, 과실비율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분들이 가장 많이 놓치는 지점은 “경찰 서류가 이미 결론이다”라고 지레짐작하고 초반에 다투기를 포기해버리는 경우입니다. 경찰 조사는 형사·행정 목적이지 민사상 과실비율 확정 절차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도, 처음 받은 보험사 제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근거를 따져볼 여지가 생깁니다.
다만 이 구조에 아쉬운 지점도 있습니다. 분쟁심의위원회는 보험사와 공제사만 직접 신청할 수 있는 구조라, 정작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개인은 보험사의 협조 없이는 이 절차를 이용할 방법이 없습니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소액 사건을 굳이 심의까지 회부할 유인이 크지 않을 수 있어, 개인이 아무리 이의를 제기해도 보험사가 움직이지 않으면 절차 자체가 시작되지 않는 구조적 한계가 있습니다.
확인/체크리스트
- 교통사고사실확인원은 과실비율을 확정하는 문서가 아니라, 이후 과실비율을 다툴 때 쓰이는 증거자료 중 하나라는 점을 기억합니다.
- 보험사가 제시한 과실비율의 근거가 된 기준표 번호를 확인하고, 실제 사고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따져봅니다.
- 블랙박스 영상, 사고 현장 사진, 목격자 연락처 등 초기 증거를 사고 직후에 최대한 확보해둡니다.
- 위원회 회부는 개인이 직접 신청할 수 없으므로, 가입 보험사 담당자에게 명시적으로 회부를 요청합니다.
- 직접 소송까지 고려한다면, 보험금을 먼저 수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 수령 후에는 보험사의 대위권 행사로 개인이 직접 다투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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