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를 당한 시점이 보험기간 안에 있다면, 그로 인한 보상은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고는 보험기간 중에 났지만, 그로 인한 사망은 보험기간이 끝나고도 두 달 가까이 지난 뒤에야 일어났다면 어떨까요. 보험사는 “보험기간이 끝난 뒤 발생한 사망은 보장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고, 원심(항소심)도 이 논리를 받아들여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같은 약관을 다르게 읽어냈습니다. 이번 판결(대법원 2026. 4. 2. 선고 2025다211789)은 “보험기간 중”이라는 익숙한 문구 하나가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유족에게 3,500만 원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건 개요 — 사고는 보험기간 중, 사망은 두 달 뒤
원고의 배우자인 망인은 2003년 4월, 보험기간을 “2003. 4. 16.부터 2023. 4. 16.까지” 20년으로 하는 상해보험(무배당 콜상해보험)에 가입했습니다. 교통재해로 사망하면 주보험에서 2,500만 원, 교통재해사망특약에서 1,000만 원, 합계 3,500만 원을 지급받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제는 사고와 사망 사이에 벌어진 시간차였습니다. 망인은 평일이던 2023년 1월, 광주의 한 아파트 앞 도로에서 자동차에 충격당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자체는 보험기간이 끝나기 석 달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망인은 곧바로 사망하지 않고, 병원에서 다섯 달 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사고로 인한 외상성 뇌출혈 수술을 받았고, 그 후유증인 뇌실염 치료를 위해 항생제를 투여받던 중 급성신손상과 전해질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담당의사는 보험기간 종료를 보름 앞둔 시점에 이미 “의식상태가 혼미하고 호전이 어려울 수 있으며, 상하지 근력저하가 영구적일 수 있다”는 소견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망인은 결국 보험기간이 끝난 지 두 달여 만인 2023년 6월, 사망했습니다.
원고는 망인의 상속인이자 다른 상속인들의 보험금청구권을 양수한 사람으로서 보험사를 상대로 3,50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청구했습니다.
원심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한 이유
보험사와 원심은 크게 네 가지 근거를 들어 지급을 거부했습니다.
첫째, 교통재해와 그로 인한 사망은 별개의 보험사고이고, 약관도 재해가 발생했다고 사망이 반드시 뒤따른다고 보지 않으므로, 보험기간 내 재해가 보험기간 종료 후 사망으로 이어졌다고 해서 이를 보험기간 내 사망과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평균적 고객의 이해가능성을 기준으로 봐도 약관은 보험기간 종료 시점에 피보험자가 살아 있는지 사망했는지에 따라 만기축하금이나 사망보험금 중 하나를 받는 구조로 설계돼 있어, 다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고 봤습니다.
셋째, 원고 주장대로 해석하면 비교적 가벼운 사고 이후 보험기간이 끝나고도 한참 뒤에 그 영향으로 사망한 경우까지 보장해야 하므로, 인과관계 인정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지고 보험사가 약정한 보험기간과 무관하게 책임을 져야 하는 불합리한 결과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넷째, 약관에는 재해 발생 후 180일 이내 사망한 경우를 별도로 정한 조항이 없고, 장해등급 관련 조항을 이 사건에 그대로 끌어다 쓸 근거도 없다고 봤습니다.
대법원의 판단 — 약관 스스로 숨겨둔 답
대법원은 결론을 뒤집었습니다. 핵심은 약관 문구 자체의 다의성이었습니다.
이 사건 약관은 “피보험자가 보험기간 중 교통재해로 인하여 사망하였을 때” 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평균적 고객의 시각에서 이 문장을 읽으면, “보험기간 중”이 서술어인 “사망하였을 때”를 꾸미는 것으로 보아 사고와 사망 모두 보험기간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원심의 판단도 이 해석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같은 약관의 다른 조항, 즉 장해등급을 다루는 조항에 주목했습니다. 이 조항은 장해등급이 일단 결정된 뒤라도, 보장받을 수 있는 기간(계약 효력이 없어진 경우 재해일부터 2년 이내) 안에 장해상태가 더 나빠지면 — 사망도 포함해서 — 악화된 상태를 기준으로 다시 등급을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즉 이 약관은 이미 스스로, 보험기간이 끝난 뒤에도 재해일로부터 일정 기간 안에 벌어진 상태 악화나 사망을 보장 범위에 넣어두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대법원은 “보험기간 중”이라는 문구가 “교통재해”만을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 보험기간 중 재해가 발생하고 그 이후 사망한 경우도 사망보험금 지급사유로 해석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두 해석 모두 합리성을 갖춘 이상, 약관은 다의적이어서 뜻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에 해당하고, 이럴 때는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5조 제2항에 따라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합니다(작성자불이익의 원칙). 그 결과 보험금 지급사유는 “보험기간 중 교통재해 발생”만 요구할 뿐, 사망까지 보험기간 안에 있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다만 대법원은 이 해석이 보험사의 책임을 무한정 늘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을 어디까지나 “보험기간 중 발생한 교통재해”로 한정했기 때문에, 보험기간이 끝난 뒤 언제 사망하든 무조건 보장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법원은 망인이 사고 이후 5개월여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고, 직접 사인이 사고로 인한 뇌출혈 수술의 후유증(뇌실염 치료 중 항생제 투여로 인한 급성신손상·전해질불균형)이었으며, 담당의사가 사망 전에 이미 영구적 후유증 가능성을 언급했던 사실관계를 근거로, 망인이 사망 전까지 일시적 장해상태에 있다가 보험기간 중 사고를 직접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보험사는 교통재해 사망보험금 2,500만 원과 특약 사망보험금 1,000만 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해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실무자의 시각에서 — 이 판례가 소비자에게 의미하는 것
실무적으로 보면, 이 판결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대법원이 사망보험금 조항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조항인 장해등급 조정 조항을 끌어와 다의성을 입증했다는 점입니다. 약관은 하나의 조항만 떼어놓고 볼 게 아니라, 전체 구조 안에서 다른 조항들과 어떻게 맞물리는지까지 봐야 한다는 걸 이 판결이 보여줍니다. 실제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당했을 때, 문제된 조항 하나만 붙들고 씨름하기보다 약관 전체를 펼쳐놓고 비슷한 취지의 다른 조항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실무적으로 꽤 유효한 접근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번에 유족에게 유리하게 작동한 작성자불이익의 원칙이 앞서 다룬 본인부담상한제 판례에서는 반대로 소비자에게 불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법리라도 약관 문구와 사실관계에 따라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걸 이번 두 판례가 나란히 보여줍니다.
다만 비판적으로 보면, 이번 승소는 결국 보험사가 약관을 명확하게 설계하지 못한 틈에서 나온 결과이지, 보험사가 애초에 “보험기간 종료 후 사망도 보장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후 보험사들이 약관을 손질해 “보험기간 중 재해 발생과 사망 모두”를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문구로 바꾼다면, 같은 논리를 다시 쓰기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번 판결에 안심하기보다, 가입 시점에 약관 문구를 직접 확인해두는 습관이 여전히 더 중요합니다.
확인/체크리스트 (실용적 행동 지침)
- 사고는 보험기간 중이었는데 사망(또는 증상 악화)이 그 이후에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보험사가 지급을 거부한다면, 곧바로 포기하지 말고 약관 전체를 다시 확인합니다.
- 약관에서 “보험기간 중”이라는 문구가 정확히 어느 단어를 수식하는지 살펴봅니다 — “재해”를 꾸미는지 “사망”을 꾸미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 문제된 조항뿐 아니라 장해등급·후유장해 관련 조항처럼 언뜻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조항까지 함께 살펴봅니다. 약관이 스스로 모순되거나 다의적인 지점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 사고와 사망(또는 장해 악화) 사이의 인과관계를 뒷받침할 진료기록과 담당의사 소견을 미리 확보해둡니다.
- 상속인이 여러 명이라면 채권양수 등으로 청구권자를 정리해두면 이후 분쟁 대응이 한결 수월합니다.
이 글은 작성자불이익원칙 · 교통재해사망보험금 · 약관해석 태그와 이어집니다. 관련 실제 사례와 칼럼은 콘텐츠가 쌓이는 대로 함께 연결해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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